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버트 F. 케네디 (문단 편집) === 법무장관 시절 ===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존 F. 케네디가 당선되자 로버트는 35세의 나이에 법무장관에 발탁되는데, 당연히 이러한 장관 인사를 두고 족벌인사, 정실인사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이 때 JFK는 "나도 기뻐하고 우리 어머니도 기뻐하는데 대체 누가 이 인사를 반대하는지 모르겠다."고 기자들에게 능글맞게 대꾸하기도 했다. 당시 로버트의 법무장관직 임명은 FBI 국장 에드가 후버가 형 케네디의 사생활을 약점으로 삼을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후버의 상관 자리에 믿을만한 인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장관이 아닌, 형의 '정치적 경호실장' 역할을 했던 셈.--그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Attorney General--] 이후 형의 신임으로 내각에서도 대통령의 심복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원래 법무장관은 그 직책의 특성상 국정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부분의 경우 국무장관, 국방장관, 재무장관 등이 내각에서 주요한 정책을 담당하면서 매스컴을 타는 경우가 많으며 서열도 법무장관에 앞선다. 혹은 국내 이슈로 인해 노동부, 복지부, 상무부, 주택도시부 장관 등이 그때그때 나서는 경우가 종종 있어도 법무장관이 언론에 나오는 경우는 그렇게 흔치 않다. 정치 스캔들이 터져도 특별검사가 언론에 나오지 법무장관이 나올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로버트의 경우 대통령의 핵심측근으로서 이들에 앞서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어쨌거나 역대 법무장관 중에서는 상당히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실세 측근 법무장관'으로서 로버트 케네디의 위상이 [[윤석열 정부]]의 첫 법무장관에 임명된 [[한동훈]]과 [[https://news.sbs.co.kr/amp/news.amp?news_id=N1006767443|비슷하다는 평]]도 나온다.]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과 존 F. 케네디 대통령 둘만 1962년 여름 대통령 집무실과 각료회의실에 녹음장치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존 F. 케네디 사후에는 248시간 분량의 회의기록, 12시간의 전화통화 내역을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의 지시로 케네디 도서관으로 옮겨졌으며 특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43시간의 녹음 부분은 1983년, 2001년에 나누어져 공개되었다. 이 녹취 대화록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의 국정수행능력을 평가하는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하지만 이 자료로 인해 그가 미사일 위기 당시 쿠바 침공을 일관되게 주장한 초강경파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가 생전에 이 사건에 대해 했던 발언들에 대한 신빙성을 의심하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자신을 굳이 온건파라고 지칭하지도 않았다. 그의 온건파 이미지는 쿠바 미사일 위기보다는 1960년대 말 대선 출마를 전후로 린든 존슨의 베트남 전쟁 수행에 관한 비판 수위를 높이면서 부각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